Our Stories

한국 교회사와 함께보는

정대위 목사 이야기

글쓴이: 강석제 목사 (2016년 11월)

1. 들어가는 글

오타와한인교회 40주년을 맞아, 정대위 목사의 일생을 요약하여 소개하고자 한다. 그럴만한 또 그래야 하는 이유가 있다.

첫째, 정대위 목사는 오타와한인교회 설립 목사이다. 세포 하나의 DNA에서 한 사람 전체의 “됨”을 측정하지 않은가? 그것은 생물학적 공부에만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교회의 생과 멸에도 적용된다. 정대위 목사를 회고하고, 그의 이력을 찾아보는 작업은 오타와한인교회의 저변에 자리잡은 DNA를 발견하도록 도울 것이다.

둘째, 정대위 목사는 오타와한인교회 뿐만 아니라 한국 교회의 큰 자산이며, 한국 교회사의 큰 거목이다. 그로 인한 신학적 그늘은 단순히 한신대학교나 종교학에만 머물지 않는다. 정대위 목사의 삶에 녹아 있는 한국 교회사의 풍성한 자산을 우리는 발견할 수 있다. 한 사람에서 한 세기에 이르는 긴 역사를 우리는 알게 된다. 그의 삶 자체가 한국 교회사의 나이테 역할을 한다.

셋째, 정대위 목사는 이민교회들의 지도자들과 신앙인들의 탁월한 스승이다. 캐나다 유학과 이민의 선구자로서 자신을 나그네와 순례자로 피력했던 정대위 목사의 삶, 신학, 이상은 이민의 땅에서 살아가야 하는 우리 자신과 우리 후손을 위한 다리가 되었다. 우리가 건너온 다리를 보면서, 우리가 나아갈 방향을 잡을 수 있지 않겠는가?

넷째, 정대위 목사는 우리가 어떤 공헌을 할 수 있을지 보여준다. 그는 다리놓는 사람(Bridge Builder)로 살았다. 하나님과 사람, 동양과 서양, 신앙과 학문, 교회와 대학, 한국과 캐나다, 한국인과 세계인의 가교 역할을 탁월하게 감당했다. 특히 그는 박사학위 논문에서와 평생의 연구를 통해서 서양 종교로 인식되던 기독교가 어떻게 한국의 상황(context)에 뿌리 내리게 되었는지를 밝히고자 노력했는데, ‘토착화신학’, ‘한국적 신학’이라는 용어가 쓰이기 이전에 한국 신학의 좌표를 정립해 주었다. 우리는 그가 걷고 우리에게 남겨 놓은 공헌을 디딤돌 삼고, 더 많은 공헌을 후세와 세상에 주어야 하겠다.

본 글은 정대위 목사 자신이 남긴 회고록을 근간으로 했다. 글의 목적을 학술적 발표에 두지 않았기에 각주는 최소한으로 했다. 많은 이들이 그를 “박사” “교수”로 부르지만, 우리 교회의 목사 이셨기에 그리고 그의 탄생과 죽음까지 그가 “순명”으로 믿고 따랐던 것이 목사 이기에 나는 그를 일관되고 정대위 목사로 부르려 한다.

 

2. 정대위 목사 생애 요약

 

1917. 10. 31. 북간도 용정에서 독립운동가인 정재면 목사의 아들로 출생

 
정대위 목사 가정의 믿음의 첫 열매는 그의 할머니로 보인다. 그의 할머니는 선교사들이 입국하기 이전에 이미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정대위 목사의 할아버지 역시, 장손으로서의 가정 임무 때문에 평양신학교로 가는 것을 포기했을 뿐, 독실한 신앙인이었다.

정대위 목사의 할머니는 평소 기도에 “손녀 딸을 주시면 전도 부인으로, 손자를 주시면 목사로!”하고 기도하였다. 정대위 목사가 출생하자 할머니는 “다윗아, 너는 목사야!” 불렀는데, 할머니의 바램대로 다윗이 그의 이름이 목사가 그의 평생 소명이 되었다. 다윗의 한문 표기가 바로 대위 ‘大爲’ 이다.

정대위 목사는 자기 고향(용정)을 “학향”이라 불렀다. 그곳엔 선교 단체가 경영하는 몇 개의 탁월한 학교들이 모여 있었다. 그의 아버지 정재면 목사가 가르치는 은진중학교, 명신 여자 중학교, 광명중학, 광명여중학, 대성중학, 동흥중학 등의 여섯 학교가 있었다. 이 학교들로 인해서 명동에서 지성과 민족해방의 정신을 겸비한 걸출한 인재들이 다수 배출되었다.

1885년 미국 장로교 언더우드와 감리교 아펜젤러로 시작된 한국의 개신교 선교 초기에는, ‘선교지역 분할협정’에 의해 외국 선교부와 교단들이 활동했다. 이에 따라 평안도와 황해도의 서북지역(관서지역)은 미국 북장로교가, 함경도와 간도의 관북지역은 캐나다장로회가 맡는 방식으로 선교지역을 분할했다. 함경도와 북간도 출신의 기독교인들은 다른 지역에 비해 상대적으로 진보적이고 자유주의적인 신학에 영향을 받았다.

정대위 목사는 태어나면서 주위에서 만날 수 밖에 없던 캐나다 선교사들을 영국인으로 불렀다고 술회하였다. 백인을 보면 미국인으로 착각하는 것과 유사한 셈이다. 정대위 목사는 의도하던 의도하지 않던 자연스럽게 캐나다 선교사들과 근거리에서 생을 시작하게 되는 셈인데, 이러한 ‘친-카나다’ 환경은 그의 Toronto와 Ottawa 생활을 넘어 임종한 Vancouver 까지 이어진다.

 

1935년. 평양 숭실학교 졸업

 

정대위 목사가 숭실을 졸업할 때의 유명한 일화가 있는데, 도산 안창호를 대면한 일이다. 그 날은 3월 4일이었으며, 졸업 하루 전이었다. 평양 최고급 레스토랑이었던 오병식당에서 큰 마음을 먹고는 친구들과 카레라이스 한 접시씩 주문하여 화려한 졸업 만찬을 자기들끼리 갖는다.. 한참을 떠들며, 보통 젊은이들이 하는 것처럼 자신들의 미래 계획과 포부를 늘어 놓는 중이었다. 그 때 정대위 목사는 “나는 목사가 된다. 민족의 지도자가 된다. 영적인 지도는 중요하다. 될 바에는 좋은 목사가 되겠다”고 호언 장담하게 된다.

그 때 옆 박스 있던 한 여성이 오더니 정대위 목사와 친구들을 자기 자리로 초청하여 한 사람을 만나게 한다. 바로 정대위 목사의 “한 평생 영웅 도산 안창호 선생”이었다. 그후 일어난 일을 정대위 목사의 회고록에서 옮긴다.

“그는 조용하고도 우렁찬 목소리로 ‘누가 목사님이오’ 하고 우리를 둘러보셨다. 우리들은 모두 교복을 입은 중학생이었다. ‘접니다’ 하고 나는 한 걸음 나설 수밖에 없었다. ‘아 목사님’ 하고 그는 우선 천천히 담배불을 재털이에 비벼끄셨다. 그리고선 ‘용서하십시오. 이건 대전 감옥에서 배운 재주이외다’ 하셨다. 그 다음 그는 ‘목사님’ 하고 내 손을 잡아 주셨다…여드름이 바가지를 쓴 열 여덟 소년, 그러나 그는 나를 ‘목사님’ 하고 부르셨다. 사십 구 년 전의 옛 이야기. 그러나 그것은 적어도 내게 있어서는 날마다 감격스런 하나의 증언이다. 그의 악수는 아직도 내 바른손에 쥐어져 있다.”

여기서 잠깐! 그의 신앙, 사상, 삶의 체계를 형성하게 했던 숭실의 전통에 대해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1897년 미국 북장로교회 선교사인 베어드의 사저에서 13명의 학생을 모아 사랑방 교실이 열린다. 이것이 ‘숭실학당’의 출범이었다. 이후 1900년에 수업연한을 5년으로 하는 정식 중학교 교과과정을 운영하였고, 1904년 세 명의 졸업생을 배출하게 된다. 숭실대 최은수 교수는 이 학교의 전통으로 ‘민주적 자주와 자립 전통’, ‘기독교적 박애와 봉사 전통’, ‘진취적 미래 지향 전통’으로 꼽는다.

숭실(崇實)이라는 이름은 실학의 실사구시 정신을 따른 것인데, 서양의 기독교 교육을 조선의 전통 사상에 접목시키고자 했던 선교사들의 노력의 일환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숭실”은 에큐메니칼 운동의 토양에 의해 설립되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조선선교부의 허가를 받아 1906년에 장로교회 감리교가 함께 연합하여 대학을 설립하게 되는데, 이는 한국교회 연합사업의 이상적인 모델이 된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조선 선교의 대부분은 지역과 사역을 분할하여 진행하였다. 이로 인해, 교단주의와 분파주의가 생성되는 문제가 야기되었다. 그러나 숭실은 연합의 정신을 따라 만들어졌고, 같은 정신을 학생들에게 물려주었다.

숭실대학의 유명한 졸업생 중 한 명인 한경직 목사는 교가 가사에 나오는 ‘합성 숭실학교’는 이 학교의 창학 정신을 알리는 표현이며 연합과 일치의 정신 곧 ‘에큐메니칼 정신’을 담은 것이라 회고했다. 한경직 목사, 정대위 목사 뿐만 아니라 수 많은 숭실 출신들이 교단과 지역을 초월한 에큐메니칼 운동에 헌신했던 토양이 바로 “숭실”이었던 것이다.

 

1935년. 일본 동지사대학 신학과 입학 (1941년 졸업)

 

당시 동지사대학 신학교는 대학령에 의해 정규로 설립인가를 받은 유일한 대학이었는데, 대학 문학부 신학과로서 2년 내지 3년제의 일반 대학 예과를 졸업한 학생을 받아들이는 학교였다. 정대위 목사는 이 학교에 2년제 대학 예과에 입학한다.

그때 학교의 두 기둥은 아시다 게이지와 히노 마스미였는데 이 둘은 서로 상반된 신학을 대표하고 있었다. 히노는 거의 극단적인 자유주의 신학자였으며 비판신학을 가르쳤다. 이에 반해 아시다는 신정통주의 입장을 가르치면서 자유주의 신학과 싸웠다. 신정통주의 신학자인 바르트를 일본에 가장 먼저 소개한 사람이 바로 아시다이다. 극단적으로 다른 이 두 종류의 신학이 한 학교에 공존하고 있는 것이 매우 흥미로운데, 이런 한류와 난류가 정대위 목사 신학에 영향을 끼쳤음은 분명하다.

동지사에서 정대위 목사는 성경신학에서 가르치는 코이네 그리스어 공부로 만족하지 않고 철학과와 영문과에서 병설한 고전 희랍어 강좌도 배우게 된다. 그리고 이와 함께 산스크리트어를 함께 배우는데, 훗날 폭 넓은 종교학 공부의 기반이 된다.

이 학교를 졸업하기 위해 정대위 목사가 쓴 졸업논문의 내용은 “칼빈의 자연신학”이었는데, 라틴 문헌을 주로 다룬 교회사 논문이었다. 이 과정에서 그의 평생 신학적 과제를 발견하는데, 바로 “기독교와 한국의 접촉 초기에 관한 공부”이다. 잘 알려진 것처럼, 정대위 목사는 칼빈 전공자가 아닌 기독교와 한국 전통에 대한 종교학자로 살아가게 되는데, 이 당시 정대위 목사는 남들이 가지 않는 종교학과 종교사회학의 길을 어렴풋하게 나마 보게 된다. 정대위 목사는 동지사에서의 선택을 “그다지 현명한 것이 아니었을런지도 모른다는 느낌”이 든다며 “성경이나 조직 신학을 공부할 수 있는 가능성도 제법 갖추어져 있었는데 – 하는 망설임이 오늘에도 내게는 완전히 해소되지 않았다”고 이후 술회했다.

 

1941년. 경북 예천에서 목회 시작

 

모든 목회자들은 자신의 첫 목회지를 잊을 수 없다. 정대위 목사도 마찬가지인데, 동지사 대학을 졸업한 후, 그는 송창근 목사의 부름에 따라 예천교회(경안노회 소속 지교회)에 담임 전도사로 부임한다. 이 때 그의 나이 23세였고, 이제 갓 결혼한 아내와 함께 허니문을 즐기게 된다.

이 시절, 정대위 목사는 주로 독일어 원서들로 이루어진 300권 이상의 장서를 보유하고 있었는데, 예천과 예천 인근의 지성인들의 사랑방이 된다. 정대위 목사는 이 현상을 두고 “설교 스타일이 아닌 전혀 다른 전도”였다고 말한다. 이 때의 경험이 워낙 감미로웠기에 예천을 제 2의 고향으로 부르게 된다.

이 해에 정대위 목사는 강도사 자격을 받고, 1942년에는 경북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는다. 그러는 과정 중에 예천교회를 떠나 김천교회로, 그리고는 영주교회로 임지를 옮기게 된다.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 하나를 언급해 보면, 정대위 목사가 김천 황금동교회에서 송창근 목사와 협동목회에 참여한 것이다.

김천의 황금동 교회는 1901년에 선교사에 의해 설립된 교회인데, 송창근 목사가 1939년에 담임목사로 부임하게 된다. 이미 산정현교회에서 목회했던 송창근 목사의 두 번째 목회지였는데, 이곳에서 그는 자기 제자들과 함께 하나의 이상적이며 모범적인 교회를 세우려고 노력한다.

정대위 목사(1944년)를 비롯하여, 공덕귀, 조선출, 김정준이 함께 이 이상적인 협동목회에 참여하게 된다. 김천이라고 하는 시골 마을에, 한국 교회 기라성 같은 신학자들과 목회자들이 함께 목회하였고, 그런 협력을 통해서 한국 교회에 공헌하려고 했다. 일제 말, 박해가 심해지자 정대위 목사는 만주로 피신하게 되고, 만주에서 해방을 맞이하게 된다.

1945~1956년. 조선신학교(한신 대학) 교수

해방을 맞자, 송창근과 김재준의 부름으로 전임강사와 교무로 일을 시작하게 된다. 그곳에서 정대위 목사는 헬라어와 신약을 가르쳤다.

문익환의 평전에 그에 대한 언급이 있다. “학교 강의는 빈약했지만 교수-학생 사회가 익히 친숙한 이름으로 가득 차 있었다. 조직신학과 기독교윤리와 구약은 김재준 목사, 교회사는 한경직 목사, 목회학은 송창근 박사, 헬라어와 신약은 정대위 목사가 가르쳤다. 학생도 문동환의 은진학교 동창인 강원용을 비롯 장준하-이우정 등 동생의 친구들이 중심 그룹을 형성하여 낯설지 않았다.”

이 당시, 한국 교회는 교단분열과 신학적 갈등으로 생채기를 넘어 깊은 몸살을 앓고 있었다. 해방 이후에 신사참배 문제로 인해 고신파와의 갈등을 겪었고, 1951년에 고신총회 설립된다. 이것이 한국의 장로교회의 첫번째 교단 분립 사건이다. 뿐만 아니라 성경의 권위와 관련하여 축자영감설을 주장하고 에큐메니칼 운동에 반대하는 그룹과 이들에 반하는 그룹이 갈등을 겪고, 급기야 1959년에 장로교회는 합동측과 통합측으로 다시 분열하고 만다.

정대위 목사가 가르쳤던 조선신학교는 자유주의신학 논쟁의 중심지였다. 평양에서 내려온 보수적인 학생들이 조선신학교 교수들에게 집단적인 반기를 드는 사건까지 일어나게 된다. 이런 류의 신학적 갈등은 신학교에서만 머물지 않고 교단 전체에 퍼지게 되는데, 결국 대화와 이해를 통해 봉합하는데 실패하고만 한국의 장로교회는 1953년에 기장과 예장으로 분열하게 된다. 한국 전쟁 이후, 한국 장로교회는 세 번의 큰 분열을 경험하고 만다. 전쟁으로 인해 민족이 가장 어려울 때, 장로교회는 스스로 분열하여 민족적 대오를 저지르게 된다.

이런 분열의 쓰라림은 정대위 목사를 비롯한 당시 한국 교인들의 뇌리에 깊이 박히게 되며, 오타와 한인교회가 세워질 무렵 교단에 속하지 않은 초교파 교회의 형태를 선택하는 중요한 원인이 된다.

1947년. 캐나다 토론토 대학 대학원 유학 (1949년 졸업)

1947년 여름, 정대위 목사는 캐나다 연합교회의 장학금을 받고 토론토 대학으로 유학을 떠난다. 당시는 미군정청에서 여권을 발행했었는데, 그가 받은 여권 번호는 81번이었고, 해방 후 외국으로 떠나는 유학생의 첫번째 여권이었다. “제 1회 미국 유학생” 33명이 인천에서 배를 타게 됐는데, 그들 중에 한 사람이었다.

이 때는 이미 남산에 장로회신학교와 부산의 고려신학교가 세워진 후였는데, 유학하던 해봄에 (앞서 말한) 자유주의신학 문제로 학생들의 고발을 받게 된다. 김재준과 송창근을 문제 삼고자 신학생 50명이 연서를 작성하고 고발했던 것인데, 정대위 목사까지도 연루시킨 것이다. 결국에는 총회로부터 아무 문제 없음이 밝혀지지만, 유학을 떠나려는 그의 마음에는 혼란과 슬픔이 겹겹이 쌓이게 된다.

토론토 유학시절, 서로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두 가지를 공부한다. 하나는 토론토 대학에서의 기독교 사회학 공부였고, 또 다른 하나는 웨스턴 테크놀로지의 인쇄학교에서 인쇄술을 공부하는 것이었다. 그가 귀국하면 신학교를 떠나서 신문을 경영하려 했기 때문이었는데, 훗날 이 계획이 유네스코의 엉크라 계획의 모체가 되었고, 대한국정교과서 인쇄 공장의 기본 설계로 이어지게 된다. “학문의 이론적인 세계와 현실의 구체적인 삶의 세계를 어떠한 방식으로든지 결부시켜” 보려는 그의 근본적인 의도를 실천했던 것이다. “실사구시”의 실학의 이념이 있었기에 가능한 공부였다.

그가 졸업할 시기에 거둔 학문적 업적은 두가지인데, 첫째는 신학박사 학위 논문 개요로 제출한 “프로테스탄트 교회 분파론”에 대한 논문이었고, 또 다른 하나는 기독교와 역사라는 저서였다. 두 번째 논문이 서울에서 1950년 5월에 출판되는데, 그 시절에 등장한 토인비에 대한 상세한 언급과 함께 토인비를 한국 지성계에 소개하게 된다.

또한 토인비의 책을 번역함으로써, 한국에서는 정대위 목사가 역사가 아놀드 토인비를 한국에 최초로 소개한 사람으로 기억하게 된다. 그러나 노년에 정대위 목사는 가신과 토인비를 연결시키는 것을 좋아하지만은 않았는데, 그 이유는 “후기의 토인비는 그 자신의 역사 형식론에 사로 잡혀 있어서 그야말로 화석화되었으며 시나일(노쇠)한 사상가가” 되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정대위 목사는 서구 사상에 대한 무조건 무비판적으로 예찬하는 수입 학자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는 이론과 그 이론을 말하는 학자의 말과 글을 그 흐름으로부터 면밀히 이해하고 비판적으로 해석할 수 있었던 안목을 가졌었고 이를 평생 잃지 않았다.

그가 학위 중이던 1948년 송창근은 미국 남 캐롤라이나에 머물면서 휴앙과 함께 학교를 위한 기금을 모금하던 중이었다. 이것이 그가 미국을 마지막으로 방문한 것이었으며, 이 때 정대위 목사와의 관계가 단절되는 일이 벌어지고 만다. 토론토 대학을 졸업한 정대위 목사는 캐나다 연합교회의 파송을 받아 캐나다 BC 주의 일본인 교회 목사로 부임하게 된다. 그의 계획은 가을까지 이 교회에 있다가 선편으로 귀국하는 것이었는데, 무슨 일이 있어도 신학교만은 떠날 작정을 하고 있었다. 이 즈음에 서울 초동교회의 담임목사로 청빙을 받는다. 한국 전쟁 직전이다.

1950~1953년. 초동교회 담임목사

귀국길에 오른 정대위 목사는 초동교회 담임 목회를 하면서 여러 역할을 동시에 맡게 된다. 한신대 교수로, 한국일보 논설위원 겸 제작부장으로 활동한다. 그리고 고려대, 동국대 등에도 출강을 한다. 1951년에는 유네스코와 인연을 맺을 무렵이었는데, 문교부에 등용된다. 그리고 피난 장관실에서 자리를 잡고 동란에 의하여 파괴된 우리 나라의 교육, 과학, 문화의 시설이며 인적 손실들을 자세히 유네스코에 보고하는 문서를 작성하는 막중한 일을 맡는다.

초동교회 웹사이트에는 당시 목회자 정대위 목사에 대한 공헌과 그에 대한 고마움이 잘 기록되어 있다.

“부산으로 피난을 간 초동식구들이 한 사람 두 사람 모여서 예배를 드리게 되니 이것이 바로 부산 피난 초동교회의 시작이다. 당시 교우들은 부산에서 유네스코 및 조선신학교 학감으로 바쁘게 업무를 보시던 정대위 목사를 찾아가 에배를 보게 해달라고 종용하였고, 결국 흩어졌던 교인들이 모여 교회를 재건하고 회사 사무실에서 감격적인 첫 예배를 드리게 된다. 1953년 휴전 협정이 체결된 7월 말에 한장형 집사가 초동교회 재건을 위하여 교우들이 모은 5만환의 정성을 가지고 먼저 서울로 올라가게 된다. 처음에는 을지로에 있는 최복음 집사 댁에서 정대위 목사 및 여러 교우들은 초동교회의 재건을 위하여 헌신을 다한다. 그 결과 전보다 넓은 교회 부지를 확보하게 되었다. 이즈음 정대위 목사는 교회의 일 이외에도 유네스코와 한국신학대학의 일을 모두 맡고 있었는데 8월 29일에는 다른 일의 피치 못할 사정으로 인해 당회장직을 사임하였다.”

명예나 자신의 안녕을 좇았다면, 이와 같은 일들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정대위 목사는 자신을 찾아오는 하나님의 사람들과 하나님의 사역으로 보이는 일들을 외면하지 않았다.

1953~1954년. 프랑스 소재 세계 유네스코 본부에 한국대표 연락원으로 파견 근무
1956년. 예일대학으로 유학

1956년, 정대위 목사는 세번째 유학길에 오른다. 두 가지 점에서 이전의 유학과는 달랐다. 첫째, 정 목사의 부인과 함께 하지 않았다. 그의 부인에게도 공부할 기회가 열렸는데, 그곳이 토론토 대학이었다. 중년이 된 이 부부는 일년 동안 토론토 대학과 예일대학으로 서로 떨어져 학문에 전념하게 된다. 둘째, 정대위 목사는 전공을 인류학으로 바꾼다. 유학의 동기와 필요성을 그가 느낀 것은 유네스코 시절에서 였는데, 프랑스 인류학자인 알프레드 메트로 (Alfred Metraux)의 비판을 정 목사가 수용했기 때문이다.

알프레드는 토론토 대학에서 정대위 목사가 쓴 “한국 교회 분파론”을 신통한 공부가 아니었다고 비판한다. 그에 의하면, 한국 교회의 성격은 인류학에서 찾아야 하며, 따라서 서로 완전히 격리된 몇 개의 문화권 안에서 이루어지는 종교적인 현상들을 비교 연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영향으로 말미암아 정대위 목사는 ‘주관적인 신앙을 연구하는 신학으로부터” “신앙 형태를 객관적으로 연구하는” 인류학과 비교종교학으로 급격하게 학문적 목표를 전환한다.

예일대학에 입할할 수 있었던 데는 리처드 니버(Richard Niebuhr) 교수의 도움이 컸다. 이 두 사람의 조우는 이미 토론토 유학시절, 리처드 니버가 토론토대학에 강연차 왔을 때 이루어지는데, 정대위 목사가 유학하던 때, 그는 종교학 학과장이었다. 리차드 니버는 「그리스도교와 문화」라고 하는 기독교사회학의 고전을 쓴 미국출신 신학자인데, 정대위 목사가 토론토 대학에서 작성한 석사학위 논문과 유사한 제목의 「교회분열의 사회적 배경」이라는 유명한 책을 썼다. 따라서 정대위 목사가 그에 대한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 리처드 니버가 가진 명성과 영향력을 알 수 있는 일화 하나를 소개한다.

그 때만 해도 유학생에게 주는 미국 비자 발급 방침은 매우 굴욕적이었는데, 중국인과 한국인은 부부 동반 유학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이런 방침으로 인해서 토론토에 있던 부인이 미국으로 오지 못하는 것을 정대위 목사는 니버 교수에게 말한다. 그러자 니버는 “미안해. 미국은 야만국이야” 하고 한 마디를 뱉었다. 그것이 전부인줄 알았다. 다음 날, 토론토 주재 미국 총영사로부터 정대위 목사는 직접 전화를 받는다. 그리고 부인의 비자를 신청한 적도 없었던 정대위 목사 부인은 미국 비자를 얻게 된다.

그 때의 일을 정대위 목사는 이렇게 썼다. “사실 이런 일은 니버 교수가 취한 행동 때문에 이뤄진 것이다. 뒤에 안 일이지만 그는 워싱턴의 국무성을 전화로 불렀다는 것이다. 그리고 한바탕 야단을 쳤다는 것이다. 워싱턴은 토론토를 불렀고, 토론토 총영사는 나를 불러댔다. 우리 두 사람은 정식으로 부부 학생으로 미국에 들어간 중국과 한국인의 첫 케이스가 되지 않았나 한다.” 부부로 미국 유학을 하게된 모든 분들은 정대위 목사에게, 더 나아가 리처드 니버에게 감사해야 할 것 같다.

1959년 봄, 정대위 목사는 종교학과 인류학으로 최초로 미국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는다. 이미 기술하였지만, 중년의 나이에 오른 유학을 부인도 없이 1년간 지내며 보낸 이 시절을 정대위 목사는 “식당 보이 노릇과 영감 학생 노릇을 동시에” 해냈던 시기로 이후 한 인터뷰에서 표현한다.

학위 논문의 제목은 “한국 사회의 종교 혼합 현상”이었는데, 한국의 전통 종교인 유-불-선(儒佛仙)이 결국 하나인 것을 논구한 것이다. 오강남 박사는 한참 후 이 책을 편집하여 2001년 뉴욕주립대학출판사에서 출판했다. 미국 인터넷 서점인 Amazon에서 구입할 수 있다. 정대위 목사 부인은 이후 이 한 인터뷰에서 이 논문이 3개월만에 작성된 것과 아들의 도움이 있었다고 귀뜸한다. 정대위 목사의 영어실력과 지적능력을 알 수 있게 한다.

학위 취득 후,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사회학과 교수로 부임하게 되며, 우리 교회 설립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평신도 지도자 오준수 장로께서 서울대학교 사회학과 학생으로서 그의 수업을 듣는다. 이후 오준수 장로 부부가 캐나다 토론토로 이주하게 되어 토론토한인연합교회 담임목사와 집사로 만나게 되는데, 하나님의 섭리가 아닐 수 없다.

1961~1968년. 건국대학교 총장

정대위 목사가 건국대학 총장으로 간 일화가 재미있다.

건국대학 설립자 유석창씨는 함경남도 단천에서 1900년에 출생한 분이었다. 서울 경신학교를 거쳐 1928년 경성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하고 민중병원을 설립하여 가난한 환자를 치료하는 데 평생을 헌신하였는데, 이후 건국대학교를 설립하고 1959년에 초대총장으로 취임한다. 그가 무려 여덟 번이나 간청하여 정대위 목사를 자기 학교로 총장으로 끌었다.

이 분의 선친 유일우씨는 정 목사의 부친도 잘 아는 처지였는데, 일우라는 이름에는 “나라를 빼앗기고 그걸 걱정한다”는 민족주의적인 정서가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실제로 그런지는 확인하기 어렵지만 유석창씨는 정대위 목사에게 건국대학을 독립군 양성소로 소개한다. 그리고는 자신이 어려서 독립군 속에서 자랐다는 사실을 말하여 울면서 독립군가를 불렀는데, 이에 정대위 목사는 감동하여 울면서 함께 불렀다고 한다. 그 가사는 함경도 사투리로 쓰였는데, “잉게는(이곳은) 우리 나라 아니오. 꾸망 / 무스거 할려구 잉게 왔음둥 / 조국의 거름될 이내 독립군 / 설땅은 없지만 희망은 있당이.” 진심 어린 노래 하나가 정대위 목사를 상관관계를 찾기 어려운 건국대학교로 이끌었다.

1968년. 서독 함부르크 대학 초청 교수로 동양학을 강의
1968~1969년. 토론토 한인연합교회 목회

건국대학교 총장을 역임하고 함부르크에서의 강좌를 끝낸 후 정대위 목사는 미국으로 가려했다. 그 참에 그의 사위(강태룡) 가정을 둘러보고 토론토대학의 임마누엘 칼리지를 방문하고자 토론토를 들른다. 바로 그 때, 오타와 칼튼대학으로부터 동양학부 부장교수로 특채되고는 미국행을 포기하고 칼튼대학 부임 전까지만 맡는 것으로 하여 토론토 한인연합교회의 2대(한국인으로는 최초) 담임목사로 부임하여 1969년 6월까지 사역한다. 후임으로 그 해 이상철 목사 부임하게 된다.

이 즈음에 캐나다 중요 도시들에서 유서 깊은 한인교회들이 설립된다. 몬트리올 한인연합교회(1965년), 벤쿠버 한인연합교회(1966년), 토론토한인연합교회(1967년). 이상의 교회들은 모두 연합교회에 속한 교회들이었고, 장로교 중에서는 토론토한인장로교회가 있다(1967년).

정대위 목사의 후임 이상철 목사는 정대위 목사의 제자이기도 하면서 김재준 박사에게는 사위가 되는 분이다. 정대위 목사가 사임할 때는 토론토 한인연합교회가 탄생한지 2년 여가 지났을 때였는데, 그때까지 이 교회는 조직교회로 등록되지 않았다. 그런데, 이상철 목사는 1969년 8월 3일에 부임한지 3주째 되던 때에 조직교회로서의 노회가입에 대한 절차를 제직회에서 통과한 후 9월 14일에 통과시켰고 10월 12일에 4명의 장로를 선출하여 당회를 구성했다.

김재준은 1960년 한국신학대학 학장 당시 4.19를 맞이하게 되고, “학생들의 피에 보답하자”는 교수 시위에 가담하면서 적극적인 기독교 사회참여를 주도한다. 5.16 쿠데타와 1971년 12월 6일 비상사태 선포로 인해서 극심한 박해에 놓이자, 1974년 3월 캐나다 망명길에 오른다. 그런 후, 1983년 귀국길에 오른다. 정대위 목사 역시 칼튼대학을 퇴직하고 한국으로 향하는데, 바로 1983년이었다.

1969~1983년. Carleton University 교수(14년간)

동양학 교수로 부임해 동양학, 동서 문화 교섭사 및 한국종교학 등을 강의

1969~1983년. American Academy of Religions(U.S.A) 회원
1970~1971년. Center for Study of World Religious, Harvard
1975~1976년. 동경대학 동양문화연구소 외래 연구원
1976. 11. 21 ~ 1983. 8. 21 오타와한인교회 담임(설립)목사

1970년대 중반 까지 오타와의 한인사회는 다른 도시들에 비해 그 규모가 제한적이었다. 대부분의 오타와 거주 한인 크리스찬들은 캐나다 교회에 출석하여 신앙생활을 하고 있었다.

1960년대 오타와 동부의 같은 동네에 살던 두 한인 가정이 성경공부를 시작했다. 이에 점차 많은 한인 가정들이 합류하면서 한인 크리스천들 사이에는 한국어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며 성도의 교제를 나눌 수 있기를 원하는 이들이 늘어났다. 그런 소망은 나중 정대위 목사가 칼튼대 교수로 오타와에 부임한 후 구체적으로 실현되었다. 정 목사는 그 당시 오타와 한인 신앙 공동체의 구심점이 되었고 친목 위주로 모이던 전체 한인 모임이 점차 예배와 말씀 중심으로 변화되었다.

1976년, 정대위 목사는 오준수, 정종식 성도와 함께 개신교나 천주교를 막론하고 오타와에 거주하는 모든 한인 크리스천들이 예배할 수 있는 모임을 기안하여 당시 한인 성경공부 인도자였던 박종일 장로와 연보현, 박언태, 김광국 성도 가정과 함께 발기위원회를 조직하였다.

1976년 11월 21일, 정대위 목사의 인도로 Glebe St. James United Church 의 소예배실에서 성인 43명이 모여 첫 예배를 드리면서 교회가 탄생하게 되는데, 이들은 자신들의 모임의 명칭을 “오타와 한인 크리스찬의 모임” (Ottawa Korean Christian Fellowship)으로 정했다. 정기예배, 성도의 교제, 복음전파와 사회봉사를 위한 기독교인들의 모임으로 자기 정체성을 세운 초기 설립자들은 이때만 해도 이 모임이 정식 교회가 되리라고는 예상하질 못했다.

그러던 중 오타와 한인사회가 조금씩 성장해 가면서 매주 모이는 한인교회의 필요성이 절실하게 요구되었고, 정대위 목사의 수락으로 창립 제5주년 기념 예배를 드렸던 1981년 11월 8일 부터 매월 두 번 격주로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으며, “오타와 한인 크리스찬의 모임”을 “오타와 한인 교회” (Ottawa Korean Community Church)로 그 명칭을 변경하였다. 이후 1983년에 최초 당회원이 선출되고, 정대위 목사는 1대 당회장이 된다. 1983년 4월 10일, 교회설립후 최초 세례식이 정대위 목사에 의해 거행되었다.

이런 오타와한인교회의 설립 과정에서 볼 때, 평신도들의 역할이 눈에 띈다. 아마도 정대위 목사는 칼튼대학에서의 교편을 우선 사역으로 보며, 오타와한인 크리스찬 모임에서는 설교자로 사여하면 되리라 여겼을지 모른다. “조직교회”로서의 밑그림이 그에게 없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자기 앞에서 열어가시는 하나님의 섭리와 부르심에 조용히 순종하여 오타와 한인교회가 탄생하고, 자라는데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다.

1983~1987년. 한국신학대학 학장
1996년. 밴쿠버 근교 화이트 락으로 이주
2003년 7월 25일 오후 3시 45분 밴쿠버 근교 포트 코퀴틀람에서 귀천

3. 그의 일생을 돌아보며

정대위 목사는 큰 산이다. 작은 동산만 해도 그 안에 서로 다른 다양한 것들이 존재한다. 다윗이라고 하는 인물도 그렇지 않은가? 우리는 다윗 이야기에서 조약돌로 상징되는 성공 이야기만 발견하는 것이 아니다. 그의 실패와 아픔과 눈물과 한숨을 함게 읽지 않는가? 정대위 목사는 한국 교회 성공과 회한을 몸소 겪고 그 근원과 진일보를 우리에게 제시하려고 했다.

그가 머물렀던 오타와, 그리고 그가 세우고 사역했던 오타와한인교회는 참 복받은 교회이다. 정대의 목사로부터 받은 영향력 속에서, 당시 한국 교회의 문제로부터 떨어져 건강하게 자라게 된다. 예를 들어서, 당시 한국 교회는 교단분열, 교회성장학, 무분별한 성령주의자들과의 갈등 등으로 진통을 겪고 있었다. 이에 반해서, 오타와한인교회는 각자의 신앙을 존중하고 서로 배우려는 교회, 큰 교회가 아닌 건강한 교회, 목사가 군림하는 교회가 되기 보다는 성도들이 민주적인 절차속에서 자기 역할을 감당하고 목회자는 그 일을 돕는 교회, 한국 문화와 언어를 지키고 캐나다 사회의 지도자로 교육하고자 자녀들을 가르치는 교회, 일찍부터 한국과 세계의 영적 경제적 궁핍에 응답하는 교회로 자리매김 하고자 했다. 이것은 정대위 목사의 값진 유산이며 동시에 과제이기도 하다.

이 글을 쓰는 때는 정대위 목사가 태어난지 100회 생일이 되는 해이다. 먼 후배이자 제자로서, 마치 먼 발치에서나마 바라보는 것으로 행복해 하는 아이돌 팬처럼, 정대위 목사의 삶, 신학, 목회를 볼 수 있어서 감사드린다. 할머니로부터 시작되고, 안창호 선생이 손까지 잡아주며 당부했던 말처럼, 그는 일평생 “목사”로 살았다. 그보다 값진 삶이 어디 있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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