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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의 능력 – 일상을 위한 기도

글쓴이: 신성철 집사 (2019년 9월 28일)
기독교 세계관 선포 이후 첫 주일 예배에서 선포된 계시: 교회의 능력 – 일상을 위한 기도

이준호 선교사님이 삼일간의 기독교 세계관 소개를 마치며 주일 예배 설교를 통해 제대로된 교회의 모습을 제시했다.

나는 그것을 기독 신앙 영역의 확장으로 이해했다. 신앙의 영역을 주일 예배, 지역 전도, 해외 선교라는 제의적, 종교적 활동을 넘어 일상 삶으로 확장하라는 것이다.

내가 줄기 차게 추구하였던 바로 그거다! 교회 오래 다니니 이런 말씀 듣는 때가 오기는 오는구나 라는 이상한 느낌도 들었다.

대언자는 “문화명령”의 실천이라는 어려운 용어를 쓰셨지만, 내가 이해하기로는 창조의 목적은 구원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 (왕같은 제사장)처럼 피조 세계와 어울려 평화롭게 사는 것 (문화명령)이고, 창조와 구원은 결국 삶을 위한 것이고 삶의 모든 영역이 신앙의 영역이다.

사실 내가 들었던 거의 모든 목사님들의 설교, 강의는 구원에서 클라이막스를 맞고 끝났던 것 같다. 이미 벌써 예수님 이름 믿고 구원 받은 교인들에게 구원은 교회 밖의 죄인을 구원하는 것이고. 그러기에 교인들이 교회 안에서의 예배는 거룩한 것이고, 교회 밖의 죄인을 구원하는 전도와 세계선교는 성스러운 의무로 여겨져 온 것 같다.

그러기에 요즘의 많은 교회와 기독교인들이 “예수 이름 믿고, 구원받는다”는 반쪽신앙에 머물러 있는 안타까운 현실 인식을 인식하라는 선지자적 선포였던 것 같다.

그 정도면 충분한 지적 유희였다. 하지만 이번에도 지식 습득하는 것에 머물러서는 안되겠다는 절박한 심정에서, 우리 교회 지도자들이 이 선교사님을 초청한 것에 의도와 목적이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부흥회 다음 첫 주일 예배 설교가 무엇일까 잔뜩 기대하고 있었다.

“교회의 능력”. 성도의 능력이 아니고. 설교제목에서 일단 개인주의를 극복하라는 메시지는 전달받았다.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우뢰와 같은 운명교향곡 같이 시작한 설교. 교회답지 못한 교회들로 인해 양산된 “가나안 (안나가)” 기독교인에 대한 얘기로 시작한 설교는 웬지 이전에 경험했던 정점을 넘어 한 차원 더 높은 클라이막스로 향할 것 같은 기대를 자아냈다. 뭔가 교회개혁을 위한 교회 지도자들의 계획과 의지같은 것이 선포되려나 내심 기대하고 긴장하며 설교를 들었다.

요지는 일상을 회복하라. 하지만 기도로 일상을 회복하라. 우리 기도하십시다. 이건 아닌데, 계획과 의지는 어디로 가고 뻔한 얘기를 하나 싶었다. 뭔가 2% 부족한 듯 했다.

하지만 일상을 위해 기도하라는 선포가 마음을 떠나지 않고 이내 씨름을 걸어왔다.

가장 일상적인 식사를 위해 몇 초짜리 식기도를 하기는 하지. 하지만 매일 반복되는 아주 사소한 것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 어색하게 다가왔다. 출근길에, 일하며, 산책하며….

나에게 기도는 초월적 사건(기적)들과 연관되어 인식되어 있는 것 같았다. 설교 중에는 좀더 Formal 한 기도를 말씀했지만, 내가/우리가 회복해야 할 기도는 초월적 사건을 위한 기도 보다도 (사실 그건 내 영역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영역이다), 항상 기도하고, 범사에 기도하고, 쉬지 말고 해야하는 기도일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일상을 위한 기도 말이다.

난 그런 기도를 초월적 사건을 위해, 항상, 쉬지 말고 하라는 걸로 성급히 이해했던 것 같다. 그래서 그런 기도는 수도사들이나 할 수 있지라고 생각했던 것도 같고.

그런데 문득 “범사에”란 단어가 아주 생소하게 다가왔다. 범사를 이제까진 모든 일에 초월적인 일이 일어나길 위해 항상,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걸로 이해했던 것 같다. 매순간 홍해가 갈라지기를 기도하라는 것처럼 말이다.

그런데, 항상, 쉬지 않고 기도하려면 자연스럽게 범사에 기도해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무슨 퍼즐 들어 맞듯이, 범사에 기도 => 항상 기도 => 쉬지 말고 기도. 무슨 수학 명제처럼 명쾌하게 이해되었다.

그리고, 범사에 기도하는 것이 일상을 신앙의 영역으로 끌어들이는 것이고. 그게 문화명령을 실천하는 것이고. “우리 같이 기도하십시다”라는 말의 의미가 이제는 아주 다르게 느껴진다.

이게 부흥회 다음 첫 주에 선포한 계획이고, 의지인가 싶었다.

하지만 여전히 개인주의적 신앙 색채가 너무 뚜렷이 남아 있는 안타까움이 있다.

우리 교회 공동체는 항상, 쉬지 말고 기도할 범사가 있는가 싶다? 교회가 교인의 일상을, 지역의 일상을 신앙의 영역으로 끌어들이는가… 여전히 교회는 기적을 소망하는 기도를 주로 요청하지는 않고 있는지.

김씨의 출근을 위해, 이군의 수업을 위해, 박양의 취미를 위해, 최씨 가족의 산책을 위해. 그렇게 우리의 일상의 삶을 신앙 안으로 끌어들이는데 익숙해지고 나서야, 진심으로 교회 밖의 삶을 열린 마음으로 끌어안을 수 있게 되고, 공유된 일상의 삶을 통해 진정성이 전달될 때 구원의 기적이 일어나고, 자연스럽게 구원 후의 일상의 삶이 넓어져 가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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